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달카날 전역 (문단 편집) === 일본군의 철수 === 사실 일본군은 12월 31일 어전회의를 통해 과달카날 철수를 결정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1월 9일 세부적인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지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에게 1월 28일부터 철수가 완료되는 2월 초까지 제공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철수작전을 기만하기 위하여 야노 중좌의 1개 대대를 파견하여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한편 미 해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이 항공기들을 집결시키고, 대규모 수송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게다가 새로 교체된 육군 부대가 나타나서 역습을 가했다는 보고를 듣자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을 비롯한 미 해군 지휘부는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오판을 하였다. 이에 따라 증원군이 급파되었으며, 이들을 호위하고 일본 수송선단을 저지하기 위해 기펜 소장에게 [[호위항공모함]] 2척이 포함된 함대를 주어 과달카날로 급파하였다. 하지만 대서양에서 대잠작전만 수행해왔던 기펜 제독은 태평양 전쟁이 항공력 위주의 싸움이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으며, 중간에 예정보다 늦어질 것 같자 느려터진 호위항공모함을 떼어내고 다른 수상함들만 거느리고 과달카날로 급행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일본 해군 항공기들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았으며 최초로 야간공습을 당한 부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이름까지 남겼다. 그래도 피해는 두들겨 맞은 것에 비해서는 그리 크지 않아서 중순양함 시카고 1척을 잃고 구축함 1척이 대파되는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렌넬 섬]] 해전) 하지만 굳이 상실할 이유가 없었던 전력인 중순양함을 잃었다는 점에서 니미츠 제독과 홀시 제독의 뚜껑이 제대로 열렸다.[* 이 일을 계기로 상부에 단단히 찍힌 기펜은 이후 전투에서 사실상 열외(...)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하지만 홀시 제독도 나중에는 이것보다 몇 갑절이 넘는 바보짓을 했다]]. 그런데 레이테 만 해전에서 홀시의 행보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레이테 만 해전]] 문서로.]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일본군이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패치 소장에게는 일본군의 대공세를 대비하여 현 지점을 사수할 수 있도록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미군은 참호를 파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 일본 제 17군은 약속된 지점에서 구축함에 승선하여 철수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철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상철수는 3번 반복되었고, 그 사이 미군이 눈치챌 수 없도록 조명탄을 터뜨려 가면서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리고 2월 7일 모든 일본군이 철수했다. 한편 분위기를 봐서는 쳐들어올 때가 됐는데 상황이 너무 잠잠하게 전개되자 미군은 당황하였으며, 조심조심 전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월 9일 과달카날의 서쪽 끝에 도달한 미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보고서야 일본군이 그 동안 왜 그 난리를 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모든 보고를 받은 패치 소장은 2월 9일 오후 4시 25분, 홀시 제독에게 "과달카날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끝났다"는 보고를 올렸고 그것을 기준으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났다. 또 같은 시기에 [[뉴기니]]의 부나-고나에서도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https://blog.naver.com/imkcs0425/60087922762|부나-고나 전투]] 동시에 이뤄진 2개의 전역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전과 보고를 받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는 미군이 지상에서 일본을 맞아서 올린 최초의 승전"이라고 치하했다. 한편 대본영에서는 이런 패배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없다며 패배를 은폐하며 다음과 같은 [[대본영발표|대국민 전과발표]]를 행했다. >과달카날에서 아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 세력을 맞아 심대한 손실을 입혔으며,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군은 과달카날을 발판으로 삼아 한층 '''전진'''하는 것이다. 사실상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데 급급한 행동이었고 그 결과 일본 국민들은 현실파악이 힘들게 되었다.[* 물론 본토 폭격까지 이뤄지고 고학력자들마저 무차별적으로 징집하는 추세로 가자 소수는 일본이 지고있음을 직감했다.] 대본영은 이후에도 이어지는 패전을 승전했다며 감추기에 급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